기획자의 자존심은 어디다 숨겨두고
요즘 점심 혼밥친구로 미드 굿닥터를 보고있다. 미드는 에피가 짧아 밥먹을 때 틀어놓으면 자리에 다시 안기 전까지 1화 정도를 가볍게 볼 수 있어서 보던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종종 틀어둔다. 메디컬드라마 장르를 좋아하는 편이라 요즘 슬기로운의사생활 보면서 허구한날 우는데 주원과 문채원이 주연을 맡았던 2013년에도 재미있게 봤었는지까지는 기억이 나진 않는다. 여튼 이제 하루에 한편정도 순순히 정주행 중인데(??) 생각이 많아진 에피가 있어서 포스팅을 써본다. (아 도입 망했네 하나도 재미없어… 😞)
상황은 이렇다. VIP 수술이 잡혔고, 이사장은 병원에서 인기가 있는 외과의사를 집어넣으려고 한다. 외과과장은 어렵지 않은 수술인데다 스포트라이트도 받을 수 있으니 이 수술을 혼자 하고 싶은데, 위에서 탑다운으로 팀원을 추가시키라고 해서 자기 팀원인 의사와 공을 나눠가져야 되는 상황이다. 마음은 들지 않지만, 고민이 되니 원장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다. 억지 인사이지 않냐고. 그러자 원장이 이야기한다. (S1.EP3)
자네가 누구야? 최고 외과 의사를 꿈꾸는 과장? 아니면 원장이 되고 싶은 과장? 후자라면 자존심은 어디다 숨겨두고 원장답게 행동해
중요하게 다뤄지는 환자가 아니라서 짧게 스치지만, 결론적으로 외과과장은 팀원을 VIP수술에 참여시켰고,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것으로 짧게 마무리되고 이야기는 다른 환자로 넘어간다.
"자존심은 숨겨두고"
이 에피를 본건 며칠이 지났지만 자꾸 생각나는 대화. 나는 최고의 기획자가 되고싶은걸까? 아니면 팀의 리더가 되고 싶은걸까?
아마도 다들 그러겠지만, 팀장이 되고난 이후 가장 두려웠던 것은 ‘실무에서 손을 놓는 것’이고, 항상 경계하는 모습은 ‘일하는 팀원을 부러워하는 것’이었다. 부러움은 시기가 되고, 질투로 자라나니 팀장이 팀원의 성과를 질투하면 팀이 망한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특히 요즘처럼 인사평가시즌이 되면, 잘 정리해서 올라오는 팀원의 성과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나도 이런걸 했다고 적고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한참 실무에서 날아다닐 겨우 30대 중반이라 그런지, 아니면 남들에게 내가 했다고 자랑할만한 포트폴리오가 부족하다는 갈증에서 오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탁월한 관리자가 되기엔 너무 힘든 거라는 걸 일치감치 깨달아서 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평범한 관리자가 되는 것보단 여전히 실무에서 잘 구를 수 있는 업자로 남고싶은 마음이 있다. 아직 실무도 만렙을 찍지 못했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이 일 저 일에 치이다보면 나는 그 자리에 있는 것 같고. 동료들은 레벨업을 하고있는 것 같고. 속도는 상대적인거라서 아무리 내가 관리자로서 성장하고 있다고 해도, 비교하는 것이 실무가 되니 무조건 뒤쳐지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매니저로서의 라이프는 팀원일 때와는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회의를 위한 회의에도 숱하게 불려가야하고, 각종 잡무를 처리해야하고, 일이 아닌 사람을 대해야해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되다. 사무실에서 근무하면 돌아다니면서 운동이라도 한답시고 위안을 삼을텐데, 행아웃과 줌을 벗삼아 앉은 자리에서 열댓개의 회의실을 넘나드는 날이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렇게 많은 회의에 끌려다녀야 하나 싶은 날도 있다. 쳇바퀴도는 일상에 발전이 없다 느끼기도 쉽다.
물론, 매니저 혹은 리더가 되고나서 성장한 부분도 분명히 있다. 나 혼자 일하는 것보다 같이 일하는게 왜 좋은지 알게 되었고, 손이 맞는 동료가 아니더라도 함께 발 맞춰 갈 수 있도록 기다리고 기다리는 인내심이 늘었다. 거의 독선적으로 내렸던 결정들은 더 많은 의견들을 천천히 듣고 결정하는 중이고, 나의 성과보다 팀 전체의 성과를 바라보며 진짜 우리 팀의 비전이 뭔지 계속 꿈을 꾸고, 함께 항해하는 즐거움도 느낀다. 가벼운 채팅 한 줄, 말 한마디에도 귀를 기울이니 감정이나 컨디션의 변화에도 공감할 수 있게 되었고, 정답이 없는 인간적인 문제들에 이렇게 저렇게 시도해보다 탁! 하고 맞아떨어질 때의 희열도 느낀다. 팀원일 때에는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팀 전체가 투입되는 큰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면, 나를 전적으로 믿고 (팀원 중 한 분이 이번 프로젝트는 미경님의 세계관이라고 했다 ㅋㅋ) 따라주는 팀원들이 있어서 든든하기도 하다. 팀 전체를 움직일 수 있고, 굵직한 의사결정을 내려감으로 인해 서비스의 방향성까지 잡아나갈 때면 정말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하지만 한켠에 남은 현업에 대한 미련들. 그리고 물리적인 한계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다는 팩트앞에서
나는 리더답게 행동하고 있을까? 자존심은 잘 숨겨두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