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파이어드 : 감동을 전하는 제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 책은 한동안 동종업계 지인들의 타임라인에서 구매 인증이 올라왔던 책이다. 나는 따라쟁이라서 고민 없이 사긴 했지만, 책 제목도 inspired인 데다 서브 카피까지 ‘감동’이라고 하여 책을 읽을 생각은 없었다. (책은 생각 좀 하고 쟁였으면!) 개똥철학일지 모르겠지만, 제품 개발은 ‘상상력’나 ‘영감’으로 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생각해서다.

어쨌든 올 상반기에 진행했던 큰 프로젝트가 끝난 직후라 정신적인 공허함이 찾아오는 번아웃과 현자 타임의 그 어디에서 책장에서 고른 이 책은 어쩌면 다시 업무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돌려놓는 큰일을 했다.

“좋은 제품은 좋은 사람이 만든다.” 뻔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이 메시지에 대해 저자는 ‘좋은 사람’을 역할과 책임으로 구체화했다. 제품을 개발하기 위한 제품 관리자, 즉 Product Owner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이런저런 책임도 져야 하기에 PO라는 자리는 직책을 부여한다고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한다. 비슷해 보이는 역할(제품 마케팅, 디자인, 엔지니어링, 프로젝트 관리자PM 등)과 어떤 점이 다르고 비슷한지, 그리고 그 일을 왜 PO와 같이하면 안되는지에 대해서도 짚는다. 무엇보다 개인의 자질과 역량을 평가하는 과정에서도 PO의 역량으로 체크해야되는 것들도 소개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보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느낀 부분은 관리자 관리하기라는 내용이었다. PO는 제품에 대한 의사결정을 하는 역할에 해당하고, 따라서 조직 내에서의 수많은 의사결정자와 그들의 역할 관계 혹은 역학 관계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십계명이 나와 있다는 점이었다.

제품 관리자, 그중에서도 큰 회사에 몸담은 제품 관리자들에게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관리자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느냐다. 그들은 자신의 관리자 때문에 속상해한다. ‘그’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갈피를 잡지 못해서다. ‘그’는 자주 달라지는 지시, 서로 부딪히는 지시를 내리며 늘 두 걸음 앞섰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곤 한다. 특히 큰 회사에서는 영향력 행사자와 이해 관계자가 너무 많아 제품을 만들어 내는 일보다 이들을 한 방향으로 이끄는 일이 진정한 도전일 때가 많다.

이 글을 읽으실지도 모르는 나의 관리자님들께 죄송하지만, 너무 격공하며 이 챕터는 열 번이라도 더 읽었던 것 같다. 같은 회사 내에서도 조직의 차이는 꽤 커서 나를 둘러싼 새로운 관리자가 나타날 때마다 ‘이 게임의 보스는 도대체 몇인 거야’ 라며 회의 때마다 전투력을 충전할 때가 많았던지라. 하지만 이건 조직의 문제보다 내가 경험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는데, 경력 대부분 사장과 사원이 전부이던 작은 조직에 주로 몸담았기에 중간 관리자들이 촘촘히 세워지는 규모의 조직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매일 스스로 시험에 임하고 그 정답을 하나씩 채점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그렇게 배운 교훈들은 대략 3~4계명 정도는 찾은 듯 한데, 그래서 잘 지키고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고. 하여튼.

책의 전반에 걸쳐 설명하고 설득하는 내용, 프로세스, 가설과 검증, 데이터… 그리고 그 중심을 잡아주는 제품 관리자. 제품은 아이디어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꽉 잡힌 프로세스 안에서 수없이 다듬어져야 한다는 것은 내 생각과도 100% 일치하는 부분이라 기뻤다. 그래서 이 책의 구체적인 R&R 정의에서 내가 부족한 부분들을 의심 없이 재단해볼 수 있어서 좋았던 건 덤.

물론, 텍스트만으로는 결국은 뻔한 내용이라 끝까지 읽으면서 허무한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뻔하지 않게 만들려면 실행해보고 업무에 녹여보고 실패도 겪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뭔가 이뤄내고 싶은 기획자라면, 개발이 너무 힘든 제품 관리자라면 꼭 읽어보라고 추천한다.

덧. 역시 번역서라 번역체는 아쉽다. 이 업계에서 잘 통용되는 역할들이 아닌 것들도 많아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다각도의 상상력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 IT업계 대한 이해가 낮거나 경험이 많지 않은 독자라면 무슨 얘기인지 모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