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점수맞춰 가놓고선 방황을 꽤 했었다. 하고싶던건 생물학이나 생명공학이었는데, 가족들의 만류와 추천으로 정보과학부에 입학하게 된다. (아이러니한건, 집안 친척들 전부 컴퓨터전공자다. 그래서 쉬워보였을지도 모른다.)컴퓨터과학과에서 2년을 허비한 후, 멀티미디어과학과로 전과. 디자인부터 그래픽, 사운드 프로그래밍 등 정말 다양한 미디어 관련 프로그래밍을 전공하고 나서 결심하게 된다. ‘프로그래머는 내 적성에 맞지 않는구나’. 그래서 막연히 ‘기획자’라는 것의 직군을 택하게 됐다. 아이디어나 하고싶은 것이 많은 편이었고, 어느정도의 개발도 배웠으니 그 중간역할로서 기획자 포지션은 나에게 꽤 매력적인 직군이었다.

기획자 커리어

기획자의 시작은 중소기업의 모바일 기획팀에 들어가서부터였다. 그곳에서는 이미 기획되고 개발된 서비스들의 운영을 하는 것이 내 업무였다. 운영이라니. 뭔가 반짝반짝한 새로운 기획이 하고싶었을 뿐인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리디 어린 생각이었다. 운영도 기획자가 담당해야 되는 부분인데 말이다.

그래서 두번째 회사로 옮기게 되었다. 다양하고 많은 앱을 가진 앱제작사였고,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주도해보기도 하고, 서비스 운영도 맡아보고, CS도 하면서 다양한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비록 안드로이드 기획쪽은 접하질 못했지만, 아이폰 앱쪽에서는 그나마 해볼만큼 해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곳도 인연은 아니었는지, 경영악화로 독립의 길을 걷게 된다.

운이 좋게도, 내가 다닌 세번째 회사가 바로 내가 만든 회사다. 배운것이 도둑질이라며, 세번째 회사에서도 역시 앱을 개발한다. 스타트업에서 기획자는 어쩌면 계륵의 존재일 수 있다. 기획자 두명보다 개발자 하나가 훨씬 득이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확인하려고 ‘나 좋아해?’라고 묻는것처럼, 당신 개발에, 당신 디자인에 있어서 기획자가 필요하냐 라고 항상 묻는 것도 이때문일것이다.

기획자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가진 생각들의 나열임을 참고해주시길.

첫번째로, 기획자가 뭐하는 사람인지는 명함의 영어직책을 적을 때 고민하게 된다.
Planner? 다이어리도 아니고, 플랜만 짜는 사람인가? Product manager? 매니저라고 하는 것이 기획자를 부르는 통상의 개념이긴 하지만, 매니저는 기획하는 사람이 아니다. 메타의 위치에서 프로젝트 전반의 일정과 커뮤니케이션 위주의 메신저 느낌이랄까. Dreamer? 이건 좀 꿈같은 이야기. Contents developer? 컨텐츠개발자? 그렇다고해서 지속적으로 컨텐츠를 생상하는 건 아니다. UX designer? 이건 국내에선 디자이너들의 영역인것 같기도 하다.

두번째로, 기획서를 작성할 때 고민하게 된다.
기술명세를 작성하다보면, 머리로 코딩을 하는것과 거의 똑같은 상태가 되버린다. 직접 프로그래밍을 하는 것이 아니니 코딩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고, 어떤 식으로 구현되고, 처리가 되는지 잘 모른다. MVC 모델에 대해서 개념은 갖고있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개발자의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연어 위주의 기능명세가 되어버리고 마는데, 디테일한 예외처리까지 잡아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한계에 부딪혀버리곤 한다.

UX기획서를 작성하다 보면, 차라리 포토샵을 켜서 스케치를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필요한 구성요소들과 아이템들을 명시하고, 그것들의 표현방법은 디자이너의 영역이고, 디자이너가 디자인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비워두는 것이 맞다고 배워서 꾸역꾸역 PPT나 Keynote를 이용해 목업형태의 UX기획을 한다. 웹 기반의 프로토타이핑 툴을 이용해보았으나, 오히려 혼란스러워 하는 경우도 있엇고. 그래서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기좋게 만드는 페이지 디자인을 시나리오 산출물로 내놓는 편이다.

세번째로, 마케팅 준비를 할 때 고민하게 된다.
3년넘게 글이란걸 꾸준히 써왓음에도 불구하고, ‘맛있는’ 글을 쓰는 것엔 늘 창작의 고통이 뒤따른다. 보기 좋은 글, 읽기 좋은 글, 인상적인 글, 의도가 명확한 글, 당신을 끌어들일 수 있는 매력적인 글. 디스크립션이 그렇고, 스크린샷이 그렇다. 이벤트 페이지가 그렇고, SNS가 그렇다. 검색이 잘되는 키워드, 수백 수천 사용자 맘에 드는 것들을 나 한사람의 머리에서 뽑아낸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나의 기획자로서의 경력 3년은, 사실 비게임 앱개발에만 한정되어 있을 뿐이다. 게임기획은 어떻게 하는지, 네이버같은 서비스 기획은 어떻게 하는지, 일반적인 회사의 전략기획팀에서는 어떤 기획을 하는지 전.혀. 모른다. 심지어 모바일용 서비스기획과 운영을 해봤지만, 대박이 나지도 않았으며, 모바일에서도 안드로이드 쪽은 사실상 모른다라고 볼 수 있고. 하지만 소규모 팀이라도 모바일 기획자가 해야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는 편이기 때문에 기획자란 뭐하는 사람인가, 그리고 뭘해야 되는 사람인가에 대해서 항상 고민하는 것 같다.

PD: Project Director

내 명함에는 Project Director라는 영문직책이 적혀있다. 프로젝트의 시작이 어디든 간에 끝을 향해 갈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 옆길로 새지 않도록 함부로 들어가지 마시오 팻말을 박아둘 수 있는 사람. 아무리 예쁜 꽃이 있어도 위험한 곳에 피어있다면 무시하고 갈 수 있도록 팀원들을 채찍질 할 수 있는 사람. 일하다 보면 까먹기 쉬운 목적과 비전에 대해서 다시 리마인드 시켜줄 수 있는 사람. 아이템에 따라 개발과 디자인, 마케팅같은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사운드나 게임화 같은 조금은 다른 영역에까지도 ‘감’이라는게 있어야 하는 사람인것 같기도 하다.

영화로 치자면, 프로젝트에 맞는 개발자와 디자이너를 캐스팅 하는 것, 적절한 엑스트라를 배치하여 주연을 살리는 것, 플롯은 물론이고, 연기자들의 연기력 지도까지 해줄 수 있는 사람. 보편적인 기획자를 ‘시나리오 작가’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기획자는 모든 것을 총괄감독 할 수 있는 ‘감독’이지 않을까. (총괄책임과 총괄감독은 다른 의미일 수 있다)

덧. 한번 쯤은 기획자가 뭐하는 사람인지 생각한 것들에 대해서 정리해보고 싶었다. 주니어 기획자의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과 번민의 산출물이니 귀엽게 봐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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