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는 필요없다.
아. 정말 지긋지긋한 이야기이다. 내가 이 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10년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레파토리다. 해외에는 기획자가 없다. 그러니 한국에서도 필요없다.
이 주장은 어쩜 변하지도 않고, 발전하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는지 모르겠다. (안 지겹니?!)
하지만 나도 오늘은 한마디 거들란다. 오늘 이야기할 내용은 기획자가 필요없는 이유에 대해서다. 각 단계는 스타트업의 성장을 기준으로 정렬되어 있다. 이 기준으로 주로 3~4의 회사에 근무했고, 1~2의 회사에서도 일해본 적 있다. (5 이상은 네이버/카카오같은 대기업이다.)
1. 디자이너, 개발자로만 구성된 아주 초기의 팀
초기 제품은 빠르게 개발되고 런칭하여 사용자의 검증을 받아야한다. 이 과정에 기획자가 난입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 속도를 낮출 뿐만 아니라, 오히려 Too much 한 스펙으로 인해 시장의 타이밍을 놓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Product Market Fit 에는 정교한 기획이 중요할 때도 많지만, 생각보다 타이밍을 잡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단계에서는 팀의 제품전략이 fast follower 든 first mover 든 기획자는 별로 도움이 안된다.
그리고 기획자도 역량개발에 도움이 별로 안된다. 보통 경력있는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의기투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괜히 잘못 꼈다간 중간에서 쿠사리만 먹게 된다. 괜히 새우등 터지지 말고 이런 팀에는 조인하려고도 하지 말자. 아무리 팀웍이 좋아보이고 해보고싶은 아이템이라고 할 정도로 마음에 든다고 할지라도 이 단계에서 기획자가 조인하는 것은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다. 비즈니스모델이 없는 단계이므로, 제품 런칭 전에 팀이 깨질 수 있고 이렇게 되면 기획자의 이력은 없을 무… 도시락 싸들고 말리고 싶다. 창업에 뜻이 있어 코파운더급으로 들어가는게 아니라면, 최소한 2단계 후반~3단계의 회사에 조인하는 것이 좋다.
2. 대표가 기획을 담당하고 있는 얼리스테이지의 회사
스타트업의 대표는 기획자의 역할을 대변하고있고, 대내외적으로 아주 명확한 Product Owner 다. (심지어 Company Owner다. 이걸 거스를 순 없다…) 엔젤투자, 시드투자, series A 정도를 투자하는 회사에 해당하며, 이 때에는 투자자가 가깝기 때문에 보이스가 크게 다가올 수 있고, 팀의 운명이 투자자의 이야기에 흔들리기도 한다. 물론 대표가 명확한 뚝심이 있어서 잘 버텨나간다면 괜찮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획자가 해야할 일이 많지않은 단계다. 그러니 이 단계에서는 굳이 기획자가 필요하지 않다. 대표가 좀 힘들겠지만 본인 뜻대로 제품을 만들어가는게 더 효율적이고 명확하다.
이 단계에서 기획자가 조인한다면, 열에 아홉은 대표의 비서가 될 확률이 농후하다. 대표는 생각보다 아주~~~ 많은 일들을 하고 있고, 기획자가 한명 더 있다면 이를 본인의 자비스로 사용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여기서 언급하는 ‘사용’은 나쁜표현이 아니다. 보통 고용주를 사용자라고 하기도 한다.) 본연의 기획업무 외에도 많은 일들을 서포트해야할 수 있다. 대략 IR자료만들기 같은게 있다.
3. 실무자가 많아졌지만, 위임을 안/못하는 회사
앞서 엔젤투자~시리즈A까지의 단계를 벗어나 시리즈 B~D 정도에 해당하는 기업들일 것 같다. 비즈니스가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팀도 빠르게 커지고, 개발자 디자이너들을 묻지마 채용하는 단계에 가깝다. 이 단계는 (2)에서의 대표이자 PO 역할을 하던 대표가 업무위임을 못할 수 있다. 디테일은 생명이고, 나는 아직 일을 할 열정이 가득하고, 팀원들은 왜 내 말뜻을 못알아듣지 이런 상태라면 더욱 위임을 하지 못하고 마이크로매니징의 향연이 펼쳐진다. 이 단계는 기획자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괜찮다. 오히려 마이크로매니징으로 내려오는 요구사항들을 명확하게 잘라서 실무자들에게 배분할 수 있는 디자이너 팀장, 개발 팀장이 있는 것이 더 낫다.
만약 이 단계에 기획자가 조인한다면, 마이크로매니징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주니어 기획자들이 조인해서 버티기에 어려운 팀이다. 하지만 비전에 뜻을 가진 좋은 사람들이 마구 조인하기 때문에 함께 휩쓸려 입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프로세스도 없고 기획도 대표의 기분 한마디에 좌지우지될 수 있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의사결정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혹은 ‘이 의사결정이 어떻게 조직/제품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살아있는 교과서가 된다. 이걸 잘 배우면 기획자로서 아주 좋은 양분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하면 대표맘에 드는 기획을 하는가’만 배우다 만다. 더 나쁜 케이스는 ‘임원에게 잘보이는 법’같은 정치질만 배우다가 사축이 되어버리기 쉽상이다.
만약 기획자가 아니라 PO로서의 역량까지 겸비한 시니어라면, 이런 단계의 회사는 아주 매력적이다. 대표의 전권을 쉽게 위임받을 수 있고 (대표도 인간인지라. 똑똑한 사람 나타나면 일을 맡길 수 밖에 없다) 이 단계의 기획자는 많지 않으므로 쉽게 제품 전반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또 회사의 업무 프로세스가 체계적이지 않으므로, 기획자 본인에게 맞는 프로세스를 도입하거나 적용시킬 수도 있다. 특히 포트폴리오가 마땅하지 않다면, 이 모든것을 내가 기획했소! 라고 하기에도 꽤 매력적인 회사라고도 할 수 있다.
4. 실무자도 많고, 기획자도 많은 회사
아마 시리즈D~단계 이상에서 발견하기 좋은 스타트업일텐데 이 단계에서는 계속 분업화가 이뤄지고 있는 규모다. 특히 비즈니스가 복잡해지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도 쉽지 않다. 이 단계에는 기획자가 해야하는 업무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거나 이슈를 정리해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는 기획자가 좋다. 만약 PPT 위주로 UI기획만 주로 해온 기획자라면 충분히 많은 일이나, 중요한 일들을 해낼 수 없다.
만약 이 단계에 기획자가 조인한다면, 업무를 체계적으로 판단하고 우선순위를 조율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경험들을 할 수 있다. 타팀과의 협업이 엄청나게 차지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기술적인 판단 역량과 디자이너의 안목까지도 충분히 장착할 수 있다. 유관부서가 어떻게 일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에 (4) 단계에서 충분히 일해본 기획자라면, (5)단계로 올라가기도 좋고, (2)(3) 단계로 내려가도 좋은 평가를 받으며 일할 수 있다.
5. 모든 업무가 분업화된 회사
기획이 아주 세세하게 분업화되어 있어 정책설계, UI/UX설계, 개발정책설계, 사용자리서치, 데이터 분석 등 다양한 분야로 나누어지는 단계다. 기획자라고 부를 일은 많지 않아서 보통 UX디자이너, 데이터기획자 뭐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전반적인 기획업무를 다루는 제네럴리스트라기보다 특정 한 직무만 담당하는 스페셜리스트로 들어가는 단계다.
이 단계에는 주니어기획자가 조인하기 쉽지않다. 대부분 전문성을 증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아주 낮은 연차의 운영기획이라거나 서포트 업무를 위주로 채용하는 포지션(혹은 공채)으로 조인해야 한다. 시스템이나 조직 체계가 커서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법을 배우기 어렵고, 의사결정단계가 많아 어떤 배경이나 맥락으로 결정된 사안들인지 이해하기 어렵기때문에 이 단계의 회사에 다니고 있다면 담당하는 업무의 ‘전문성’을 겸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일에 임해야 한다.
기획자가 필요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슬프게도 가장 가까이서 일하는) 디자이너나 개발자가 많다. 모든 일은 기획이며, UI/UX에 전문성을 가진 디자이너가 보기엔 PPT에 와이어프레임을 그리는 게 참으로 한심하고 답답하고 퍽퍽해보일 수 있겠다. 개발자 역시 예외처리를 해야하는 케이스조차 정의하지 못하고, 웹과 앱을 구분하지 못하는 기획자가 한심해보일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백번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아주 다른 일이다.
나는 대학때 신문을 조판하면서 쿽이나 인디자인 등을 다뤄서 간단한 편집디자인을 할 수 있고, 앱 기획을 하며 안 써본 프로토타입툴이 없으며 스케치는 나올 때부터 사용해서 플랫한 디자인이라면, 앱 UI 디자인을 할 수 있다. 이런 앱 디자인이라면 내가 더 낫겠네 하는 생각을 안해본 것도 아니다. 홈페이지도 템플릿 그럴듯한거 사서 서버에 올리면 된다. 그럼 웹 프론트 개발자 필요없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다. 현재의 역량을 떠나서, 동료의 전문성을 이해하고 나보다 더 깊게 생각해 더 좋은 솔루션을 찾아낼 것이라 믿어주는 것이 마땅히 해야할 도리라고 생각해서다.
기획자가 PPT그리는 것만 보고, 기획자는 필요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기획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PPT가 아니다. 아주 극히 일부의 업무시간을 할당(팀장이 되어버려서 더욱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화면 작업은 한달동안 하루도 안되는 것 같다. 비율로 보자면 5%)하는데, 나머지 일들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기획자는 필요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기획자가 나머지일을 할 필요가 없는 아주 초창기 팀이나 얼리스테이지의 팀에서만 일해본 사람들일 것이다. 조금만 단계가 올라가도 PO, PM, UI/UX, 데이터, 정책, 운영… 기획포지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해내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물론 본인이 기획역량이 충분해서 기획자의 일을 대신할 수도 있다. 그럼 그렇게 일의 영역을 넓혀가면 될 일이고, 기획자는 그런 화면기획의 업무를 디자이너나 개발자에게 위임하면 그만이다. 고작 화면설계 업무를 위임한다고 기획자가 쓸모없어지는 직군이라고 생각한건가? (풉. 웃어서 미안해.)
그런 말을 들으면, 역량있는 기획자와 일해보지 못한 안쓰러운 마음이 절로 드는 게 사실이고, 기획자가 없어도 되는 단순한 비즈니스 단계에서만 기여해본 사람이라는게 뻔해서 함께 일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때도 있다. 만약 기획자가 하는 일이 한심해보인다면 ‘기획자 필요없어’라는 말보단 ‘기획자의 전문성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거나 ‘우리 팀이 기획자와 함께 일하는 방법을 찾아내자’라고 말할 수 있어야 좋은 동료다.
기획자는 필요없다. 너같은 동료.
ps. 이런 대화에 상처받은 기획자분들이 있다면, 우아한형제들 기획자 인재풀에 등록해주십시오. 😉